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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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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는 1856년 미국에서 태어나 1915년 사망한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이자 기계 기술자이다. 그는 과학적 관리법의 창시자로, 생산성 향상을 위해 작업 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테일러는 시간 연구, 동작 연구, 차별적 성과급제 등을 통해 노동 생산성을 높이려 했으며, 그의 방법론은 '테일러리즘'으로 불리며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과학적 관리법은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노동자 소외, 비인간적인 작업 환경 조성 등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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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 - [인물]에 관한 문서

2. 생애

1856년 3월 20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법률가를 지망하여 하버드 대학교 입학 시험에 통과했으나 눈병 때문에 단념하고 1874년 필라델피아에 있는 펌프 제조 공장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5] 1878년 미드베일 제강 회사(Midvale Steel)에 입사해 기계공·기사장(技師長)으로 일했다.[6] 이 시절 그는 철강·기계 산업에서 보편화돼 있던 ‘은밀한 태업’[7](soldiering)의 관행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8] 1883년 스티븐스 공과대학교(Stevens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기계공학 학위를 취득하고, 1890년부터 1893년까지 필라델피아의 한 회사(Manufacturing Investment Company of Philadelphia)에서 일했다.[5] 1893년부터 독립적인 경영 컨설턴트로 활동했는데, 1898년부터 1901년까지는 베들레헴 제강 회사(Bethlehem Steel)에서 근무했다.[5] 이후, 현업에서 은퇴하여 자문·강연·저작 활동에 몰두하였다.[9]

테일러는 1856년 퀘이커 집안에서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저먼타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랭클린 테일러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였으며, 주택 담보 대출로 재산을 쌓았다. 어머니 에밀리 아네트 테일러(결혼 전 성은 윈슬로)는 열렬한 노예제 폐지론자였으며, 루크레시아 모트와 함께 활동했다.

어머니에게 일찍 교육을 받은 테일러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2년간 공부했고, 18개월 동안 유럽을 여행했다. 1872년,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 아버지처럼 변호사가 될 계획을 세웠다. 1874년, 하버드 입학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으나 야간 학습으로 인해 시력이 급격히 나빠져 다른 길을 선택했다.

하버드 대학교 대신, 패턴 제작자 겸 기계공 견습생이 되어 필라델피아의 엔터프라이즈 유압 공장(테일러 가문의 친구들이 소유한 펌프 제조 회사)에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이 기간 동안 시력이 회복되었다. 6개월 동안 견습을 그만두고 필라델피아 센테니얼 박람회에서 뉴잉글랜드 기계 공구 제조업체 그룹을 대표했다. 4년 간의 견습 과정을 마치고 1878년 미드베일 철강 공장에서 기계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미드베일에서 시간 기록원, 숙련 기계공, 기계 공장 감독자, 연구 책임자, 마침내 공장 수석 엔지니어로 빠르게 승진했다.

미드베일 강철 공장 항공 사진, 1879.


미드베일에서 노동자이자 기계공으로 일하면서 테일러는 노동자들이 기계나 자신을 최대한 열심히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당시에는 "soldiering"라고 불리는 관행), 이로 인해 회사에 높은 인건비가 발생했다. 감독자가 되었을 때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생산량을 기대했다.

미드베일에서 일하는 동안, 클래런스 클라크와 1881년 US 내셔널 챔피언십에서 첫 테니스 복식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 이는 US 오픈의 전신이다. 1883년에 스티븐스 공과대학교에서 통신 교육으로 기계 공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884년 5월 3일, 필라델피아 출신의 루이스 M. 스푸너와 결혼했다.

베들레헴 철강 공장, 1896.


1890년부터 1893년까지 메인주와 위스콘신주에서 대규모 제지 공장을 운영하는 필라델피아의 제조 투자 회사에서 총괄 관리자이자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다. 1893년,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적인 컨설팅 회사를 열었다.

1898년 베들레헴 철강에 합류하여 비용이 많이 드는 기계 공장 용량 문제를 해결했다. 1898년부터 1900년까지 테일러와 마운셀 화이트는 텅스텐 합금강이 절삭 속도를 두 배 또는 네 배로 증가시킨다는 결론을 내렸다.

1901년 베들레헴 철강을 떠났다. 강연, 저술, 컨설팅을 통해 자신의 관리 및 기계 가공 방법을 홍보하는 데 남은 경력을 집중했다. 1904년부터 1914년까지 아내와 세 명의 입양된 자녀와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살았다.

1906년 10월 19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부터 이학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에 미국 기계 기술자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2년 미국 철학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고,[1] 1915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2] 그해 초봄, 폐렴에 걸려 1915년 3월 21일, 59번째 생일 다음 날 사망했다. 펜실베이니아주 발라 시나이드의 웨스트 로럴 힐 묘지에 묻혔다.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눈병으로 인해 대학을 중퇴했다.

1874년에 기계공 견습생이 되어, 공장 조건에 대한 학습을 했다. 엔지니어 자격을 얻은 후 필라델피아의 미드베일 스틸 사에 작업자로 취직했다. 직장 반장으로 발탁된 테일러는 6년 동안 "테일러 공장 시스템"[4]이라고 불리는 과학적 관리법을 실천, 공작 기계 개량 및 작업 공정 개선을 실시하여, 직장에 만연해 있던 "조직적 태업"을 타파하고 노동 비용 절감을 달성했다. 그 공적으로 수석 기술자(직장)로 승진했다. 미드베일 사 재직 중에 고속도강을 발명하는 등, 약 200개의 특허를 취득했으며, 컨설턴트업으로 독립할 때 기초가 되었다. 재직 중에 스티븐스 공과대학에서 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890년 미드베일 스틸 사를 퇴직한 후, 몇몇 회사에서 공장 관리를 한 후, 1898년에 베들레헴 스틸 사로 옮겼다. 거기에서 관리 재편성을 시도하고, 노동자 작업 및 도구 표준화를 꾀했다. 1902년 엘리엇 크레슨 메달을 수상했다.

이후, 컨설턴트로서 몇몇 기업을 되살리고, 과학적 관리법 연구를 진행하여 체계화했다. 1906년부터 1907년까지 기계 학회 대표를 맡았다.

만년에는, 1915년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할 때까지, 노동조합을 대표로 하는 과학적 관리법 도입에 반대하는 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거기에 반론하는 등, 과학적 관리법 옹호자로서 활동했다.

3. 과학적 관리법

테일러는 산업 효율성을 개선하고자 했던 기계 공학자였다. 그는 과학적 관리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최초의 경영 컨설턴트 중 한 명이었다. 피터 드러커는 테일러를 작업 과학의 아이작 뉴턴(혹은 아르키메데스)에 비유하며, 그가 작업 연구의 첫 번째 토대를 놓았다고 평가했다.

1910년 미국 대법원 판사 루이스 브란데이스는 주간 통상 위원회에서 동부 운임 사건에 대한 논쟁 과정에서 ''과학적 관리''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브란데이스는 테일러의 원칙에 따라 관리하면 철도가 임금을 인상하기 위해 요금을 인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테일러는 1911년에 출판된 자신의 논문 ''과학적 관리의 원리''에 브란데이스의 용어를 사용했다. 동부 운임 사건은 테일러의 아이디어를 경영 의제의 최전선으로 밀어 올렸다.

테일러의 접근 방식은 ''테일러의 원리''라고도 불리며, 종종 비하적으로 ''테일러리즘''이라고 불린다.

3. 1. 과학적 관리법의 원리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은 노동 생산성을 높이고 태업을 방지하기 위해, 기존에 근로자에게 의존하던 작업 관리를 경영자의 과학적인 과업 설정(課業設定)이라는 계획적 관리로 전환시켰다. 임금 문제 해결을 위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표준 작업량을 설정하고, 차별적 성과급제(differential piece rate)를 도입하였다.[10]

테일러는 과업 설정을 위해 시간 연구(time study)를 실시했다. 노동자들의 작업을 기본 동작으로 분해하고 불필요한 동작을 제거한 후, 각 동작별로 최선의 것을 찾아 스톱워치로 단위 시간을 측정했다. 이렇게 특정 작업에 대해 도구, 동작, 시간을 결합하여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할 수 있는 과업을 구성하였다.[9] 제러미 리프킨은 "테일러는 직공의 세부적인 행동까지 조사함으로써 효율성 제고를 위해 어떤 행동을 고쳐야 하는지 권고할 수 있었다. 그에 따른 시간 절약은 종종 몇 분의 1초까지 측정되었다."라고 묘사했다.[11]

테일러는 자신의 시스템을 도입하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매우 정확하게 생각했다.

> 이러한 더 빠른 작업을 보장하는 것은 방법의 ''강제적인'' 표준화, 최상의 도구 및 작업 조건의 ''강제적인'' 채택, 그리고 ''강제적인''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표준 채택과 이러한 협력을 강제할 의무는 ''관리자''에게만 있다.

노동자는 각 작업에 적합하게 선택되어야 했다. 테일러는 통제권을 노동자에서 관리자로 이전하는 것을 믿었다. 그는 정신 노동(업무 계획)과 육체 노동(업무 수행) 사이의 구분을 증가시키려고 했다. 작업과 수행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상세한 계획은 관리자가 수립하여 노동자에게 전달해야 했다.[9]

하지만 그의 시스템 도입은 종종 노동자들의 반감을 샀고 수많은 파업을 유발했다. 워터타운 병기창에서의 파업은 1912년 의회 조사를 촉발하기도 했다.

테일러는 노동자가 그들의 고용 가치가 있다고 믿었고, 임금은 생산성과 연관되었다. 그의 노동자들은 기존 관리 하의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는데,[3] 이는 과학적 관리를 사용하지 않는 공장 소유주들에게는 그를 적대시하게 만들었다.

테일러는 노동과 자본의 화해를 약속했다. 그는 과학적 관리의 승리로 노동조합은 할 일이 없어지고, 산출량 제한이라는 최악의 특징도 제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테일러는 과학적 관리법의 수법을 고안하고 실천함으로써 생산 현장에 근대화를 가져왔으며, 매니지먼트의 개념을 확립했다.

테일러 이전에도 프랑스인 페로네나 영국인 배비지가 1800년경에 시간 설정을 실천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작업 분할'을 실시하고 요소별로 '시간 연구'를 실시하는 방법을 확립한 것은 테일러이다.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 것은 1910년에 일어난 미국 동부의 철도 회사가 화물 운송 요금 인상을 요구한 사건이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화주 측 변호사인 루이스 브란데이스가 테일러의 관리법을 소개하고, 철도 회사의 비효율적인 운영을 지적함으로써 전미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브란데이스나 길브레스, 테일러의 제자인 간트 등에 의해 테일러의 관리법이 '과학적 관리법'으로 명명되었다.

1911년에는 '과학적 관리의 원리'를 출판했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믿었다.

  • 현재의 관리자는 아마추어이며, 학문으로서 연구되어야 한다.
  • 노동자는 협력해야 한다. 또한 따라서 노동 조합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 훈련되고 자격을 갖춘 관리자와 협력적이고 혁신적인 노동자 간의 협력에 의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관리자는 협력적이고 혁신적인 노동력이, 노동자 측은 훈련되고 자격을 갖춘 관리가 필요하다.

3. 2. 시간 연구와 동작 연구

테일러는 과업 설정을 위해 시간 연구(time study)를 수행하였다. 노동자들의 작업을 기본 동작으로 분해한 후 쓸모없는 동작을 제거하고 각 동작별로 최선의 것을 찾아낸 후 스톱워치로 단위 시간을 측정하였다. 이런 식으로 특정한 작업에 대하여 도구, 동작, 시간을 결합하여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할 수 있는 과업을 구성하였다.[9] 제러미 리프킨은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테일러는 직공의 세부적인 행동까지 조사함으로써 효율성 제고를 위해 어떤 행동을 고쳐야 하는지 권고할 수 있었다. 그에 따른 시간 절약은 종종 몇 분의 1초까지 측정되었다."[11]

테일러 이전에도 프랑스인 페로네나 영국인 배비지가 1800년경에 시간 설정을 실천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작업 분할'을 실시하고 요소별로 '시간 연구'를 실시하는 방법을 확립한 것은 테일러이다.

3. 3. 차별적 성과급제

테일러는 임금 문제 해결을 위해 과학적·객관적인 표준작업량을 설정하고, 차별적 성과급제(differential piece rate)를 도입하였다.[10]

테일러는 과업 설정을 위해 노동자들의 작업을 기본 동작으로 분해한 후 쓸모없는 동작을 제거하고 각 동작별로 최선의 것을 찾아낸 후 스톱워치로 단위 시간을 측정하는 시간 연구(time study)를 수행하였다.[9] 제러미 리프킨은 "테일러는 직공의 세부적인 행동까지 조사함으로써 효율성 제고를 위해 어떤 행동을 고쳐야 하는지 권고할 수 있었다. 그에 따른 시간 절약은 종종 몇 분의 1초까지 측정되었다."라고 묘사하였다.[11]

테일러는 작업 분석을 통해 "가장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랭크 길브레스의 동작 연구 방법과 결합되어 나중에 시간 및 동작 연구 분야가 된 스톱워치 시간 연구를 개발했다. 그는 작업을 구성 요소로 나누고 각 구성 요소를 1/100분 단위로 측정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연구 중 하나는 삽질과 관련된 것으로, 가장 효과적인 적재량이 21.5파운드라는 것을 알아내고 각 재료에 대해 그 양을 퍼낼 수 있는 삽을 찾거나 설계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개념을 적용하는 데 실패했지만, 그의 제자들(특히 헨리 간트)의 노력을 통해 업계는 그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게 되었다.[3]

4. 테일러주의의 확산과 영향

테일러는 과학적 관리법을 고안하고 실천함으로써 생산 현장에 근대화를 가져왔으며, 매니지먼트 개념을 확립했다. 테일러 이전에도 프랑스의 장-로돌프 페로네나 영국의 찰스 배비지가 1800년경에 시간 설정을 실천했지만, '작업 분할'을 실시하고 요소별로 '시간 연구'를 실시하는 방법을 확립한 것은 테일러였다.

1910년 미국 동부 철도 회사가 화물 운송 요금 인상을 요구한 사건은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화주 측 변호사 루이스 브란데이스는 테일러의 관리법을 소개하며 철도 회사의 비효율적인 운영을 지적했고, 이를 통해 테일러의 관리법은 전미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브란데이스, 길브레스, 간트 등에 의해 테일러의 관리법은 '과학적 관리법'으로 명명되었다. 1911년 테일러는 저서 '과학적 관리의 원리'를 출판했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믿었다.


  • 현재의 관리자는 아마추어이며, 학문으로서 연구되어야 한다.
  • 노동자는 협력해야 한다. 따라서 노동 조합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 훈련되고 자격을 갖춘 관리자와 협력적이고 혁신적인 노동자 간의 협력에 의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관리자는 협력적이고 혁신적인 노동력이, 노동자 측은 훈련되고 자격을 갖춘 관리가 필요하다.


1912년 테일러의 동료들은 그의 가치와 영향력을 증진하기 위해 테일러 소사이어티를 설립했다. 테일러가 사망한 1915년 이후 10년 뒤, 테일러 소사이어티는 800명의 회원을 보유했으며, 여기에는 많은 미국의 주요 산업가와 관리자가 포함되었다. 1936년 이 협회는 산업 엔지니어 협회와 합병하여 경영 발전 협회를 형성했으며, 이 협회는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테일러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성과급 지불제 사안》(1895년)
  • 《Shop Management(공장 관리)》(1903년)
  • 《과학적 관리법의 원리》(1911년)

4. 1. 미국

테일러의 저술은 미국 기계 기술자 협회(ASME)에 발표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여기에는 《벨트에 관한 노트》(1894), 《성과급제》(1895), 《작업장 관리》(1903), 《금속 절삭 기술》(1906), 《과학적 관리의 원리》(1911)가 포함된다.

테일러는 1906년부터 1907년까지 ASME의 회장을 역임했다. 회장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시스템을 ASME의 관리에 적용하려 했지만 많은 반대에 직면했다. 그는 간행물 부서만 부분적으로 재조직할 수 있었다. 또한 ASME의 오랜 비서였던 모리스 르웰린 쿠크를 내쫓고 캘빈 W. 라이스로 교체했다. 그의 회장 임기는 문제로 가득했고, 진보 시대 동안 ASME 내부의 불화의 시작을 알렸다.

1911년, 테일러는 자신의 기사를 모아 책으로 묶어 ASME에 출판을 의뢰했다. ASME는 해당 텍스트를 검토하기 위해 임시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에는 제임스 메이프스 도지와 헨리 R. 타운과 같은 테일러의 지지자들이 포함되었다. 위원회는 보고서를 《아메리칸 머신니스트》의 편집자 레온 P. 알포드에게 위임했다. 알포드는 테일러 시스템의 비판가였고 그의 보고서는 부정적이었다. 위원회는 보고서를 약간 수정했지만 테일러의 책을 출판하지 말라는 알포드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테일러는 화가 나서 책을 회수하고 ASME의 승인 없이 《원리》를 출판했다. 테일러는 1912년에 이 책을 직접 출판했다.

4. 2. 소련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소련에 대한 내용이 없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는 작성할 내용이 없다.

4. 3. 프랑스

르 샤틀리에프랑스에서 테일러의 저서를 번역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중 정부 소유 공장에 과학적 관리를 도입했다. 이는 프랑스의 이론가인 앙리 파욜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파욜은 1916년 저서 ''산업 및 일반 관리''에서 관리의 조직 구조를 강조했다. ''일반 및 산업 관리''에서 파욜은 "테일러의 접근 방식은 우리가 설명한 방식과 다른데, 그는 '바닥에서 위로' 회사를 살펴본다. 그는 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 즉 노동자의 행동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행동이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그들을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며, 하위 계층에서 배운 내용을 계층 구조에 적용한다 "[1]고 하였다. 그는 테일러가 조직의 하위 계층의 개인과 함께 작업하는 참모 분석가와 고문이 효율성을 개선할 방법을 식별한다고 제안한다. 파욜에 따르면, 이러한 접근 방식은 "명령 통일의 원칙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2]

파욜은 ''공장 관리''에서 테일러는 « ... 기능적 관리의 가장 두드러진 외적 특징은 각 작업자가 단 하나의 지점에서만 관리자와 직접적인 접촉을 하는 대신 ... 매일 8명의 다른 상사로부터 지시와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8명은 (1) 경로 사무원, (2) 지시 카드 담당자, (3) 비용 및 시간 사무원, (4) 갱 보스, (5) 속도 보스, (6) 검사관, (7) 수리 보스, (8) 공장 규율 담당자였다. »[3] 라는 테일러의 기능적 관리를 비판했다.[4] 파욜은 이것이 실현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하며, 테일러가 테일러의 저술에서 설명되지 않은 방식으로 차이점을 해결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1922년경 저널리스트 폴레트 베르네주는 전후 프랑스에서 인기를 끌었던 테일러의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5] 베르네주는 크리스틴 프레데릭이 미국에서 시작한 가정 과학 운동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으며, 베르네주는 이를 프랑스 가정에 맞게 적용했다. 프레데릭은 테일러리즘의 개념을 공장에서 가정 일로 옮겼다. 여기에는 적절한 도구, 동작에 대한 합리적인 연구, 작업 시간 조절 등이 포함되었다. 가정 일에 대한 과학적 기준은 작업장에 대한 과학적 기준에서 파생되었으며, 이는 주부의 작업을 간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6]

''프랑스 전국 조직 위원회''(CNOF)는 테일러리즘을 고객 기반을 확장하는 방법으로 본 언론인 및 컨설팅 엔지니어 그룹에 의해 1925년에 설립되었다. 설립자 중에는 앙리 루이 르 샤틀리에 및 레옹 기예와 같은 저명한 엔지니어가 포함되었다. 베르네주의 가사 조직 연구소는 CNOF 설립으로 이어진 작업의 과학적 조직에 관한 다양한 회의에 참여했으며, 1929년에는 CNOF에 가계 경제에 관한 섹션을 이끌었다.[7]

4. 4. 영국

과거의 역사적 기록들은 영국 산업이 테일러의 가르침에 대해 다른 비슷한 규모의 국가들보다 덜 관심을 보였다고 시사했다. 그러나 더 최근의 연구는 영국의 엔지니어와 경영자들이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러한 불일치는 주로 역사가들이 분석해 온 내용 때문인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테일러의 방식은 독일처럼 기관을 통하기보다는 컨설팅 회사를 통해 영국에 더 많이 전파되었으며, 특히 베도 컨설턴시를 통해 전파되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혼합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특히 열성적이었던 이들은 캐드버리 가문, 시봄 라운트리, 올리버 쉘던, 린달 어윅이었다. 린달 어윅은 테일러 시스템을 구현하기 위한 컨설팅 회사인 어윅, 오어 & 파트너스(Urwick, Orr & Partners)를 설립한 것 외에도 F.W. 테일러와 과학적 관리의 주요 역사가이기도 하여, 1940년대에 ''과학적 관리의 형성'' 삼부작과 1956년에 ''경영의 황금 서적''을 출판했다.

4. 5. 대한민국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와 관련된 대한민국 관련 내용이 없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

5. 평가

피터 드러커는 테일러를 산업 효율성을 개선하려 했던 기계 공학자이자 과학적 관리의 아버지로 묘사하며, 최초의 경영 컨설턴트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드러커는 테일러가 작업에 대한 체계적인 관찰과 연구를 처음으로 시도한 인물이며, 그의 '과학적 관리'가 지난 75년 동안 선진국 노동 대중을 부유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12]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는 다음 네 가지 원칙으로 구성된다.

# 기존의 경험에 의한 작업 방식을 작업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기반한 방식으로 대체한다.

# 각 직원을 수동적으로 훈련시키는 대신 과학적으로 선택, 훈련 및 개발한다.

# "각 작업자가 수행하는 개별 작업에 대한 상세한 지시 및 감독"을 제공한다.[13]

# 관리자와 노동자 간에 작업을 거의 균등하게 분배하여 관리자는 과학적 관리 원칙을 작업 계획에 적용하고 노동자는 실제로 작업을 수행하도록 한다.

미국 대법원 판사 루이스 브란데이스는 1910년 주간 통상 위원회에서 동부 운임 사건에 대한 논쟁 과정에서 ''과학적 관리''라는 용어를 만들었으며, 테일러는 1911년에 출판된 자신의 논문 ''과학적 관리의 원리''의 제목에 이 용어를 사용했다. 테일러의 접근 방식은 ''테일러의 원리''라고도 불리며, 종종 비하적으로 ''테일러리즘''이라고 불린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은 테일러주의에 매우 감명을 받았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옹호하며 서구식 경영 기법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일러주의와 헨리 포드의 대량 생산 방식은 소련의 산업화 기간 동안 조용히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프레더릭 테일러의 방법은 소련에서 실제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14]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 것은 1910년에 일어난 미국 동부의 철도 회사가 화물 운송 요금 인상을 요구한 사건이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화주 측 변호사인 루이스 브란데이스가 테일러의 관리법을 소개하고, 철도 회사의 비효율적인 운영을 지적함으로써 전미에 알려지게 되었다.

테일러와 그의 이론은 예브게니 자먀틴의 1921년 디스토피아 소설 ''우리''에서도 언급된다.

;저서


  • '성과급 지불제 사안'(1895년)
  • 'Shop Management(공장 관리)'(1903년)
  • '과학적 관리법의 원리'(1911년) 등

5. 1. 긍정적 평가

피터 드러커는 “테일러는 생산성의 열매를 가장 많이 가지고 가는 것은 소유주가 아니라 노동자라는 생각을 죽을 때까지 갖고 있었다. 그의 주된 동기는 소유주와 노동자, 즉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가 생산성 향상에 공통으로 관심을 갖고 지식을 작업에 적용하는 데 있어 협조관계에 있는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테일러의 사상을 지금까지 가장 가깝게 이해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일본의 소유주와 일본의 노동조합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다윈-마르크스-프로이트’가 ‘현대세계를 창조한 삼위일체’로 인용되고 있는 것에 불만을 표하면서 “만약 이 세상에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마르크스를 빼고 테일러를 대신 집어넣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12]

과학적 관리는 제품 생산비 감소, 노동자의 임금 인상에 기여했고,[13] 대한민국과 같은 후발 국가의 급속한 산업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14] 테일러는 과학적 관리법을 고안하고 실천함으로써 생산 현장에 근대화를 가져왔으며, 매니지먼트의 개념을 확립했다.

테일러 이전에도 프랑스인 페로네나 영국인 배비지가 1800년경에 시간 설정을 실천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작업 분할'을 실시하고 요소별로 '시간 연구'를 실시하는 방법을 확립한 것은 테일러이다.

1911년에 저서 '과학적 관리의 원리'를 출판했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믿었다.

  • 현재의 관리자는 아마추어이며, 학문으로서 연구되어야 한다.
  • 노동자는 협력해야 한다. 또한 따라서 노동 조합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 훈련되고 자격을 갖춘 관리자와 협력적이고 혁신적인 노동자 간의 협력에 의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관리자는 협력적이고 혁신적인 노동력이, 노동자 측은 훈련되고 자격을 갖춘 관리가 필요하다.

5. 2. 부정적 평가

노동조합인본주의자들은 주로 테일러를 비판했다.[15]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테일러가 미국 사회의 목적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며, 노동자의 지적 참여를 배제하고 생산 활동을 기계적인 측면으로만 환원시킨다고 비판했다.[16] 해리 브레이버만은 《노동과 독점자본주의》에서 테일러리즘이 노동자들을 교체 가능하고 개성을 잃은 상품처럼 취급한다고 비판했다.[17]

제3세계에서는 테일러리즘의 철학적 기반은 무시하고 단순한 기법만을 도입하여 노동력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어 비판받기도 하였다.[9]

경영 이론가 헨리 민츠버그는 테일러의 방법에 대해 효율성에 대한 집착이 측정 가능한 이점을 덜 정량화된 사회적 이점보다 우선시하게 만들고, 사회적 가치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고 비판한다.

테일러의 방법은 사회주의자들에게도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작업장에서 노동자의 점진적인 무력화와 그에 따른 노동의 저하를 비판했는데, 이는 자본에 의해 추진되는 경영진이 테일러의 방법을 사용하여 노동을 반복적이고 정확하게 만들면서 단조롭고 기술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제임스 W. 라인하트는 테일러의 생산 통제권을 노동자로부터 경영진으로 이전하는 방법과 노동을 단순 작업으로 분할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소외를 심화시켰다고 주장했다.

6. 저작

wikitext


  • 1894년. "[https://archive.org/stream/transactionsof15amer#page/204/mode/2up Notes on Belting]," ''Transactions of the American Society of Mechanical Engineers,'' Vol. XV, pp. 204–259.
  • 1895년. "[https://archive.org/stream/adjustmentwages00taylgoog#page/n45/mode/2up A Piece-rate System]" in: ''The adjustment of wages to efficiency; three papers ...''.
  • 1903년, 1911년. ''[https://archive.org/details/shopmanagement01tayl Shop management, by Frederick Winslow Taylor ... with an introduction by Henry R. Towne ...]''. New York, London, Harper & Brothers.
  • 1903년. "[https://archive.org/stream/transactionsof24amer#page/1336/mode/2up Shop management]," ''Transactions of the American Society of Mechanical Engineers'' 24: 1337-480
  • 1906년. "[https://archive.org/stream/transactionsof28amer#page/30/mode/2up On the Art of Cutting Metals]," ''Transactions of the American Society of Mechanical Engineers,'' Vol. XXVIII, pp. 31–350.
  • 1911년. ''[http://www.gutenberg.org/ebooks/6435 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 New York and London, Harper & brothers.
  • * 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영어 한국어판: 《[https://books.google.co.kr/books?id=Ba12RQAACAAJ&dq=%ED%94%84%EB%A0%88%EB%93%9C%EB%A6%AD+%ED%85%8C%EC%9D%BC%EB%9F%AC+%EA%B3%BC%ED%95%99%EC%A0%81+%EA%B4%80%EB%A6%AC%EB%B2%95&hl=ko&sa=X&ved=0ahUKEwjzgO7ppenbAhXFj5QKHdiHDCYQ6AEIJjAA 과학적 관리법]》. 방영호, 오정석 옮김. 21세기북스.
  • 1911년. ''[https://archive.org/details/treatiseonconcre00tayluoft A treatise on concrete, plain and reinforced: materials, construction, and design of concrete and reinforced concrete]''. (2d ed). New York, J. Wiley & sons.
  • 1912년. ''[https://archive.org/details/concretecoststa01thomgoog Concrete costs]''. New York, J. Wiley & sons.


'''주요 저서'''

  • A Piece-rate System영어 (성과급 지불제 사안, 1895년)
  • Shop Management영어 (공장 관리, 1903년)
  • 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영어 (과학적 관리법의 원리, 1911년)


'''선별된 논문'''

  • Notes on Belting영어 (1894년)
  • A Piece-Rate System영어 (1896년)
  • Shop Management영어 (1903년)
  • On the Art of Cutting Metals영어 (1906년)

참조

[1] 웹사이트 APS Member History https://search.amphi[...] 2023-11-22
[2] 웹사이트 Frederick Winslow Taylor https://www.amacad.o[...] 2023-02-09
[3] 서적
[4] 문서 Tailor shop system
[5] 웹사이트 Harvard University > Collection of Historical Scientific Instruments > Explore with Waywiser > People > Frederick W. Taylor http://waywiser.fas.[...] Harvard University
[6] 두산백과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 https://terms.naver.[...]
[7] 문서 은밀한 태업은 [[사보타주|공식적 태업]](sabotage)과 달리 적당히 일함으로써 생산량을 제한하는 것을 뜻한다.
[8] 웹사이트 테일러가 마르크스보다 위대한가? https://terms.naver.[...]
[9] 뉴스 성과급제 원조…그는 노동자의 적인가 http://www.hani.co.k[...] 한겨레
[10] 두산백과 과학적 관리법 https://terms.naver.[...]
[11] 서적 유러피언 드림: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민음사
[12] 서적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한국경제신문사
[13] 뉴스 기술은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이상·목표·열망이 나타난 것 http://news.hankyung[...] 한국경제
[14] 뉴스 배운 무식쟁이 사회가 된 한국의 운명은?··· 한국인 모두가 가치관을 확실히 해야 http://pub.chosun.co[...] 조선pub
[15] 사전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 https://terms.naver.[...] 사회문화연구소
[16] 서적 그람시의 옥중수고 1 : 정치편 거름
[17] 서적 Labor and Monopoly Capitalism: The Degradation of Work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8] 논문 Shop management, by Frederick Winslow Taylor http://babel.hathi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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